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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
 
 

천변풍경

  저자 : 박태원
  출판사 : -
  출판년도 :
  분야 : 시/에세이/문학
a4용지 10매내외 핵심요약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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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전쟁 1 : 제1부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2 : 제2부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3 : 제3부 계명산천은 밝아 오느냐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4 : 제1부 칼노래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5 : 제2부 칼노래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6 : 제1부 타오르는 불꽃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7 : 제2부 타오르는 불꽃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갑오농민전쟁 8 :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깊은샘
교보문고  BCMall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교보문고  BCMall     
천변풍경
저자 : 박태원 / 출판사 : 빛샘
교보문고  BCMall     

 

'모던 뽀이' 박태원과 천변풍경
월탄 박종화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금으로부터 7, 8년 전 소화 7, 8년경 조선문단에는 기괴한 실로 기기괴괴한 '갑바'(河 童) 머리에 너부죽한 이마를 앨 써 좁히고 시커먼 각테 안경에 탈모주의로 해괴하게도 거 리를 횡보하는… 이른바 최첨단(?)을 걷는 문학의 청년사도가 한 사람 나타났다."
- 박종화, 「박문」 제6호, 1939. 3
'갑바' 머리는 지금 말하는 바가지 머리 모양을 닮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일본에서 건너온 최신식 머리 모양이었다 하니 박태원은 이처럼 새로운 유행을 몰고 다닐만큼 당대 최신식의 모던 보이였다.
당시 쓰여진 작가 인상기에도 박태원의 독특한 성격이 유달리 강조되어 있다.
"그 모습이 괴상한 정도로 그 성격도 괴벽이 농후한 듯하다. 어덴지 젊음에 당치 않을만 큼 대인연(大人然) 말없이 뽐내는 빛이 보이는 것은 도회에서 자라나 지나치게 세련된 관 계도 있겠지만 너무 조숙한 탓인 듯하다. … 어린아이가 실크햇트에 연미복을 입고, 스틱 을 집고 시침이를 딱 떼고 섰는 광경… 그러한 인상이 농후하다."
- 이석훈, 「중앙」, 1936. 5
독특한 스타일만큼이나 글쓰는 방법 또한 특이해서 당시 세인들의 가십거리로 등장하곤 했다. 박태원은 항상 팔에 대학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그곳에 도시의 풍물, 군중의 모습을 적어 넣었고, 상상력만으로는 소설이 되지 않아 실물을 눈앞에 보기 위해 도심지를 오가곤 했다. 이러한 창작법은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분신인 소설가 구보가 대학노트 한 권을 들고 정오에 집을 나와 서울 거리를 배회하다 새벽 2시에 집으로 귀가하는 하루의 일과를 담고 있다.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일일』은 1930년대 경성 도심의 지도를 재구할 수 있을 정도로 서울 거리가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천변풍경』 역시 1930년대 청계천변을 그대로 모사(模寫)하고 있다. 『천변풍경』의 배경이 된 청계천 주변은 실제 박태원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이 작품에 나오는 한약국집은 그의 부친이 경영하던 공애당약국(共愛堂藥局)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천변풍경』은 순수 경알이(서울)파 문인인 박태원이 '조선말을 수집하는 어학자로 앉아서도 경알이말의 노다지를 발견했다고 찬탄'할 만한 언어의 잔치를 벌인 것이며, 천변에 사는 이름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도시적이며 현대적인 일상을 그린 작품인 것이다.
중인 집안 출신의 서울 토박이
박태원 문학의 특징은 역시 그의 출신이나 경험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박태원은 1909년 박용환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당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숙부는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박태원은 중류 이상의 집안에서 자랐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홉 살까지 집안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18년에 보통학교를 입학하여 4학년을 수료하고 다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동경으로 건너가 법정대학 예과에 입학, 본과는 채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퇴했다. 학교 성적은 대개 중간 정도를 유지했는데, 학교 성적엔 별로 관심이 없고 문학창작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학적부의 기록에는 품행이 "쾌활하지만 경솔함" 혹은 "명민 쾌활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쾌활하고 재기 넘치는 유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자주 고독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자신을 천재라고 단정하고 천재에게는 정규의 학교교육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휴학한 적이 있기도 했다. 실제로 1927년 학교를 휴학하고 세계의 명작들을 보다 폭넓게 읽으면서 숙부와 고모의 주선으로 만난 춘원과 백화에게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박태원이 최초로 발표한 글은 1923년 「동명」지에 실린 「달맞이」라는 글이고,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1926년 3월 「조선문단」에 발표된 「누님」이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박태원은 1928년 스무살의 나이에 갑자기 부친을 잃게 된다. 그 후 다시 학교에 복학하여 졸업하고, 이후 도일하기 전까지 약 일년간 박태원(泊太苑) 혹은 몽보(夢甫)라는 필명으로 소설, 시, 평론, 번역 등을 발표한다. 박태원은 일년간 창작에 몰두했으나 한계를 깨닫고 보다 넓은 문학의 바다를 위해서 도일, 동경으로 건너간다. 이 당시 박태원은 영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조이스나 프루스트 류의 의식의 흐름 수법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는 서구화의 물결이 넘치는 동경에서 최신 예술양식, 영화나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서울로 돌아온 박태원은 본격적인 소설 창작에 몰두하면서, 주로 신변 체험적인 사소설이나 심리묘사에 주력한 일련의 내성소설을 발표하고 실험적인 기법을 적극 실천한다. 1933년에는 '구인회'에 가입하여 이태준, 이상과 더불어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기존 작가들의 진부한 문학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문학을 지향하기 시작한다. 특히 박태원은 이상과 아주 친하여 항상 붙어 다니며 유머와 독설로 세상을 풍자하였다. 박태원은 누구보다도 이상의 사생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삶을 이해해 주었다. 박태원은 이상을 모델로 한 「애욕」, 「제비」, 「염천」 등의 소설을 발표하고 이상은 박태원의 소설에 하웅이라는 필명으로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박태원이나 이상이 모더니스트로서 문학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이었던 이태준의 후원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감도」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대한 독자와 평론가들의 항이와 비판이 거셌는데도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태준의 배려 때문이다. 박태원의 월북에는 이태준의 영향이 컸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박태원은 후에 경제적인 어려움과 시대의 황폐함 속에서 모더니스트 문학의 빛을 잃고 대다수의 문인들과 함께 대동아공영권의 터무니없는 제국주의 선전에 동조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박태원 문학은 통속소설, 중국소설 번역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독립순국열사전』등의 민중적 작품을 쓰고,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1945년부터 다른 문인들이 월북하기 시작하지만 박태원은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에 온 이태준, 안회남 등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에서 이데올로기 배제를 외쳤던 모더니스트가 월북까지 하게 된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가 중인 출신의 서울 토박이로 어떤 신념보다 주변 정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인 까닭이었을 것이다.

월북 후 박태원은 「조국의 깃발」(1952), 「리순신 장군」(1952) 등을 썼다. 그러나 1956년 남로당 계열로 몰려 숙청되고 한때 시골 소학교 교장으로 생활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박태원은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사건을 소설화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1960년 작가로 복귀한 뒤 이를 토대로 1963년에서 1964년에 걸쳐 갑오농민전쟁의 전편이 되는 『계명산천은 밝았느냐』를 발표한다. 그러나 1965년 망막염으로 실명하게 되고, 1975년에는 고혈압이 악화되어 전신불수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날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되는 『갑오농민전쟁』은 1977년부터 박태원이 사망한 후인 1986년에 이르러 완성, 출간되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청계천변 빨래터에는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가 한창이고 건너편 이발소에선 재봉이가 마을의 소식을 물어와 정보 교환이 쉴 새 없다. 그 이야기 속에는 마을 누구가 첩살림을 시작했고, 누구가 바람을 피웠으며, 누구는 시골서 올라왔고, 누구는 시골로 낙향했다. 천변 사람들의 천태만상 인생살이에는 기막힌 이야기도 참으로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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