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재회


나는 말 그대로 방랑자가 되었다. 집안에서는 나에 대해서 차라리 포기한 듯했다. 내가 애국심이라든가, 야망 따위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그림이나 그리면서 방랑하는 걸 묵인하기로 한 듯했다. 동생이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가끔 전화만 해서 내 생존을 확인할 뿐, 그 이외의 간섭은 하지 않았다. 여느 때라면 생활비를 조달해주는 대신 무언가의 의무도 요구하곤 했는데, 이제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타락한 놈팽이처럼 빈둥대면서 화구를 등에 맨 채 온 세상을 걸어 다녔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 서너 해가 지난 듯하다.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대여섯 해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시절 정확한 날짜의 개념을 잃어버렸다. 연도나 날짜는 몰라도 계절은 봄이었다. 나는 유럽 북부의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자 했지만, 실상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고 그저 정처 없이 돌아다녔을 뿐이다．
그렇게 몇 년을 홀로 돌아다니면, 장담하건대 사랑이나 증오가 사라지게 된다. 물론 정의라든가,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틀렸다고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죄다 가련할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김우영을 만난 건, 튀빙겐의 어느 허름한 대학교 처마 아래에서 추위를 피해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9월이었는데도 추위에 몸이 온전치 않았다. 산악지역을 그만큼 돌아다녔으면 추위에 익숙해지는 게 정상이건만, 내 약해진 몸은 독일의 을씨년스럽게 축축한 추위에 적응하지 못했다.
“엇? 사토씨?”
누군가가 익숙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들어서 보니 양복 차림의 김우영이 몇몇 젊은 독일 학생들과 서 있었다.
“맞죠? 사토씨. 차림새가 등반대 차림이어서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그래도 동양인이기에 접근해본 겁니다.”
“아, 김우영씨.”
나는 일어나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김우영은 말하다 말고 내 화구 보따리를 내려다보고 싱긋 웃었다.
“외무성을 그만두시더니 아예 화가의 길로 들어서신 건가요?”
생각해보니 김우영은 한때 나와 같은 외무성 소속이었다.
“김우영씨는 여기로 전근을 오신 겁니까?”
“아니, 저도 그만두었습니다.”
김우영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든 갑시다. 숙소는 어디로 잡았습니까?”
“아직.”
“그럼 내 숙소로 갑시다.”

김우영은 작고 아담한 하숙집에 묵고 있었다. 우리는 하숙집 일 층에 있는 식당에 마주 앉아 뜨거운 고기스프에 위스키를 마셨다.
“혼자 왔습니까?”
“아니, 함께 왔습니다. 아내는 파리에 있어요. 나는 여기서 석 달간 법률 공부를 하게 되어서 서로 떨어져 있지요.”
김우영과 혜석은 외무성의 제안으로 세계일주에 나섰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비와 체류비를 모두 외무성에서 대주면서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라고 했다는 말이다.
“위로휴가치고는 꽤 후하군요.”
김우영이 멋쩍게 웃었다.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처음 외무성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나였습니다. 부영사가 되어서 만주에 간 것 말입니다.”
“좀 의아하더군요.”
김우영이 술잔을 내려놓고 싱긋 웃었다.
“많이 망설였지만 경성을 떠나고 싶기도 했고, 고향을 등지고 만주 땅에 가서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독립지사들도 도우신 걸 압니다.”
김우영이 멈칫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같은 외무성이라서 알 뿐입니다. 그런 걸 칭찬하거나 비난할 마음도 없습니다. 나는 정치가 지긋지긋합니다. 사상이니, 이상이니, 철학 따위도 지긋지긋합니다. 인간에게 그런 게 필요하기는 합니까?”
김우영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변명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외무성에서 세계일주를 보내주겠디고 했을 때, 저는 반대했습니다. 동화정책을 쓰느라 많은 조선의 명사들을 회유하는 중이었고 나는 그 가운데 하나로 선택된 겁니다.”
김우영은 술잔을 들어 건배하듯 내밀었다.
“난 사토씨나 경석 처남처럼 아나키스트도 아니고 독립지사도 아니지만, 적어도 일본에 협조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요. 다시 변호사 일이나 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변명은 대단히 웃겼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차이가 있나.
“그런데 제 아내는 너무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세계일주를요.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술가로서 새로운 문화와 접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아내의 뜻을 따랐습니다.”
나는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때 나는 불현듯 혜석이 보고 싶어져서 그녀가 머물고 있다는 파리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파리에 들르실 일이 있으면 제 아내도 잠시 만나주십시오. 파리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요. 그래도 아내가 사토씨는 많이 신뢰하고 좋아했습니다. 연락이 끊어진 것을 아쉬워했어요.”
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파리에는 조선의 유학생들이 많다. 그 유학생들이 혜석을 싫어할 리가 있을까. 혜석은 누구보다도 더 잘 지낼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파리는 겨울비로 파리 특유의 우중충한 회색빛이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면도를 하고 정장을 차려입었지만 축축한 비로 인해 금세 후줄근해졌다.
혜석은 외국인들에게 장기로 방을 빌려주는 작은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머무는 사람들이 주로 일본에서 온 주재원들이어서 어렵지 않게 그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나는 일주일 정도를 매일 찾아가고 메모를 남겼지만, 그녀는 도통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면도를 하고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후에 두터운 코트를 입고 호텔 로비를 서성거렸다. 눈이 내려서인지 사람들은 많이 들떠 있었다. 사실 눈이라면 파리보다는 일본이 많이 내린다. 그래서 일본에 살다가 파리로 나온 주재원들은 눈이 내리는 것이 고향 생각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다들 들뜨는 게 당연했다.
나는 주재원들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피해 창가 쪽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동안 파리의 하숙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동생이 그사이에 꽤 많은 생활비를 보내주어서 당분간은 술값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위도식이 지겹기도 하지만, 그때 나는 미국에 이민비자를 신청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죄책감 없이 지내고 있었다. 미국의 외무성에서는 내 이민신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결정은 날짜가 필요할 뿐이었다.
물론 내 의도는 미국에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싫은 것뿐이었다. 그나마 미국을 택한 것은 유럽보다는 안정적으로 보여서였다. 미국에 비해서 유럽은 일본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장기적으로 내 일생을 살기에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그건 외무성에 근무하던 시절에 은연중 잡은 느낌이었다.
“어? 저 커플 말이야.”
옆자리의 주재원 몇 사람이 웅성거렸다.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지.”
“저 여자 대단해. 남편이 멀쩡하게 있으면서 말이야.”
나는 주재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심결에 창밖을 보았다. 창밖은 이제 막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파랗게 변한 거리에 함박눈이 내리는 풍경은 이제까지의 파리와는 다른 낭만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 거리에 남녀 한 쌍이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훌쩍 크고 긴 수염을 기른 중년의 동양인이었고 여자는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여자였다.
나는 움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조선 여자치고 저런 여자가 있을까?”
“저 양반 묵는 호텔에서 아예 산다고 하던데?”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두 남녀는 길에 서서 서로 끌어안은 채 눈을 마주치면서 다정하게 계속 속삭였다.
“남편은 알까?”
“모르겠지. 지금 독일에 있잖아.”
남녀가 마침내 헤어졌다.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고, 여자는 연신 손을 흔들면서 호텔의 현관으로 향했다.
“외무성 돈으로 잘들 노는군.”
“저 양반, 독립운동 하는 조선인이라던데?”
“그런데 어째서 외무성이 돈을 대주나?”
“외무성에서는 저 여자랑 여자 남편한테 돈을 대주는 거지.”
남자가 돌아서서 걸었다. 덕분에 나는 남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인물은 더러운 인물이다. 최린. 외무성에서는 저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뚫고 있었다. 독립지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우리 외무성의 끄나풀이었고, 총독부의 끄나풀이었다. 저 남자는 일본 정부가 대주는 자금으로 외국까지 돌아다니면서 독립지사들을 접촉하고 있었다.
혜석이 로비로 들어섰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로비로 걸어나갔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아마도 저놈은 또 뭐야 하는 시선들일 것이다.
“앗, 사토씨.”
혜석은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혜석의 다락방에서 보이는 지붕들에 눈이 내려 쌓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혜석이 준 사과로 만든 브랜드를 마시고 있었다. 혜석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마냥 천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사토씨는 나하고 정말 전생에 뭔가 인연이 있었나 봐.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남편 따라 독일에 가 있지 않고…”
“난 파리가 좋아.”
“제네바에도 갔었나 보지?”
들은 바가 있어서 물었다. 여기 주재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면 혜석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응. 거기서 폐하도 만났어. 어디서 들었어?”
“아, 주재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영친왕 이야기도 나왔어.”
혜석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피식 웃었다.
“그게 일본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화제가 되나?”
“민감하지.”
“민감할 만한 분이 아닌데?”
나는 이야기를 잘못 꺼냈구나 싶었다. 조선인들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 좀 하는 거야?”
“아니. 별로 그리지 못했어.”
나는 대화를 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내가 궁금해할 것에 대해서 말해주기를 바랐다.
“아까 그 사람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알지?”
“응. 뭐, 잘은 모르지만.”
“여기 유학생들이 많이 따르는 독립지사야.”
그건 궁금한 게 아니다.
“나, 사랑에 빠졌어.”
혜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은 더 반짝이고 입술에서 윤기가 돌았다.
“너무 멋지고 남자다운 사람이야. 처음에는 이게 존경심인지 사랑인지 모를 정도로 그 사람은 존경스러운 면이 있어. 물론 그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지.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은 모두 그 사람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드니까.”
나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이러니저러니 내 나름대로의 정보를 말해주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연히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이유는 없는 거다.
“그 사람의 연설 들은 적 있어?”
그에 대해서라면 알 만큼 안다. 외무성에서나 총독부에서 그의 인간됨이나 내력을 알고 있고, 그의 연설은 분석까지 해서 보고서로 작성되었다.
“들어봤어.”
“그럼 알겠네, 그 사람에 대해서.”
“총독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그렇겠지? 독립지사인 줄은 알지만, 천도교 교령이니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해.”
나는 혜석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럽게 그녀가 화가라는 걸 인식했다. 예술가구나. 이렇게 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게 바로 예술가구나. 한쪽만 성장하는 천재들의 비극이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파리에 있는 만큼 그림에 좀 더 신경 쓰지 그래?”
“그림?”
“좋은 기회잖아.”
“그렇지?”
혜석은 들떠 있었다. 좀체 예전의 투쟁적이고 이성적이던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마치 저 옛날 최승구와의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그녀는 생기 있고 반짝거렸다.
나는 그녀의 행복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착각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 남자가 내가 아는 이중적인 행위를 혜석에게까지 한다 쳐도 상관없었다. 어느 때는 진실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