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저자 : 권필
출판사 : -
출판년도 :
분야 : 국내고전문학
|
목릉문단과 석주
저자 : "권필, 정민" / 출판사 : 태학사
|
|
한편의 시로 죽음도 불사한 야인(野人) 예나 지금이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이끌었다. 음유시인 김삿갓이라 불리던 김시습이 그러했고, 조선 후기 권필 또한 은둔생활을 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겨 후대 사람들에게 학자로서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권필은 일찍부터 대단한 재능을 보였으나, 반골(反骨) 기질로 인하여 과거를 통해 관인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그는 시와 술에 빠져 야인(野人)으로 일생을 보냈다. 세태를 풍자한 궁유시(宮柳詩)는 그의 반골기질에서 나온 비판과 저항정신의 산물이다. 광해군 3년(1611) 진사(進士) 임숙영이 {W:책문시(策問試)}에서 당시의 정치를 풍자하고 권세 있는 가문의 {W:전횡(專橫)}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말썽을 빚었다. 그때 시험관들은 이 사실을 두려워하여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때 광해군이 이 글을 직접 보고 몹시 화를 내며 임숙영을 낙방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대신(大臣)들은 그 정도의 이유로 과거응시자를 낙방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반대했다. 그해 여름이 다 지나도록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지 못하다가 가을에야 비로소 그대로 발표하도록 허락했다. 바로 이 일이 '더러운 시대엔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던 권필의 비위를 건드려 놓았다. 권필은 임숙영의 이름을 합격자 명단에서 빼리라는 소문을 듣고선 분개하여 칠언절구시(七言絶句詩) 한 편을 지어 퍼뜨렸다. 이것이 바로 권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궁유시'이다. 궁버들 청청한데 꾀꼬리 날아들고, 宮柳靑靑鶯亂飛 성 가득 {W:관개(冠蓋)}가 봄볕에 상긋거리네. 滿城冠盖媚春暉 조정에선 {W:승평락(昇平樂)}을 축하하는데, 朝家共賀昇平樂 누가 바른말이 {W:포의(布衣)}에서 나오게 했나. 誰言危遣出布衣
이 시에서 '관개(冠盖)'는 벼슬아치를 가리키고, '궁유(宮柳)'는 광해군의 외척인 유씨(柳氏; 유의분 등)를 가리킨다. 또한 '포의(布衣)'는 임숙영을 가리킨다. 이 시는 임숙영의 용감성을 넌지시 추켜세운 풍자시이다. 광해군은 분노하여 시 지은 사람을 찾던 중, 광해군 4년(1612) 무옥(誣事)에 연루된 조수륜의 집을 수색하다가 이 시를 발견했다. 광해군은 이 시의 작자가 권필임을 알게 되자, 곧바로 그를 잡아들이라 명했다. 권필을 문초(問招)하자, 그는 임숙영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조정에 직언(直言)하는 신하가 없으므로 이 시를 지어 조정의 여러 신하들을 풍자했다고 과감하게 자백했다. 드디어 광해군은 권필을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좌의정이었던 오성 이항복 대감이 평소 권필의 재주를 아깝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울면서 강력히 간언했다. 권필은 이항복 등 여러 대신들의 간청으로 죽음을 면하고 귀양길에 올랐다. 권필은 귀양을 가던 중에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그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첫번째는 그가 귀양을 가던 중 동대문밖에 나와 어떤 주막에 들렀는데, 주막에는 한편의 시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지진 않지만 그는 시를 읽고 마치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그는 이 시를 읽고 유배지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귀양길에 들렀던 그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고 잠을 잤는데, 이튿날 갑자기 죽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권필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때 권필의 나이 43세였다.호방하고 강직한 재야 시인의 삶 권필의 자(字)는 여장(汝章), 호(號)는 석주(石洲)이며, 탁월한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본관은 안동이며, 1569년(선조 2)에 서울에서 권벽(權擘)의 7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권벽은 과거에 합격하여 이이(李珥)의 천거로 사관(史官)에 기용, 중종실록·인종실록·명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조용히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며, 문장이 탁월했다'고 당시 사람들이 평가했다. 권필은 이런 부친 밑에서 많은 정신적 영향력을 받으며 성장했다. 또한 권필의 여섯 형제들은 비슷한 기질의 소유자들로서, 서로 정신적 영향을 주고받은 듯하다. 맏형 위는 술병으로 과거도 포기하고 외롭게 지냈고, 둘째형 인과 셋째형 온은 송강(松江) 정철의 문인으로 많은 시를 남겼으며, 넷째형 겹은 성품이 강직하여 과거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해주에 은거하면서 세태를 한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권필의 아우 도(韜)도 문장에 능하여 일찍 과거에 합격했지만 형인 겹과 필이 화를 당하자 세 번이나 유배를 갔다. 권필은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송강의 풍모를 사모하여, 송강이 강계(江界)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을 때, 동악(東岳) 이안눌과 같이 찾아갔다. 송강이 몹시 반가워하며, "천상에서 내려온 두 신선을 보게 되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신선 같은 풍격(風格)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국왕이 의주로 피난하는 사실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권필은 국왕을 잘 보필하지 못한 이산해, 유성룡 등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권필은 세상의 공명에 초연해졌다. 1601년(선조 34)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권필은 원접사(遠接使)인 월사 이정구의 추천으로 {W:제술관(製述官)}이 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여러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을 받았으나, 의관을 갖추고 예조(禮曹)에 나아가 배알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사퇴하고 말았다. 그는 천성이 곧고 바른 말 하는 것을 좋아했다. 따라서 그의 시 가운데는 정치를 풍자한 작품들이 많다. 〈궁유시(宮柳詩)〉와 〈충주석(忠州石)〉은 그 대표적인 풍자시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죽음을 자초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인 자취를 더듬어 보면 한편으로 낭만과 정감이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주생전》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정 온 중국인 주생의 슬픈 사랑얘기를 우연히 듣고 안타까워 하다가 이를 소설로 작품화했다. 《주생전》은 과연 권필이 지은 것일까? 《주생전》의 작자가 권필(權 :1569∼1612)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서는 몇 가지 고증을 통해 〈주생전〉의 작자가 권필임을 밝혔다. 우선 〈주생전)의 끝 부분에 '권필'이라고 적혀 있는 이본이 있다. 또한《주생전》에 삽입된 시들과 권필의 문집인 《석주집》에 실려 있는 시의 경향이 아주 흡사하고, 작품의 시대배경이 권필의 생애와 일치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권필을《주생전》의 작가로 확신하게 되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주생은 재주와 학식이 뛰어난 태학생(太學生)이었지만 몇 번 과거에 낙방한 후, 공부를 전폐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장사하는 데만 얽매이지 않고 마음가는 대로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고향인 전당(중국 절강성에 있는 지명)에 가게 됐다. 그곳에서 어릴 시절 같이 자랐으나 지금은 몰락하여 기생이 된 배도(俳桃)를 만난다. 배도는 주생의 풍채와 재주에 반하여 그를 사모하게 되고, 배도의 눈물겨운 사랑의 호소를 받은 주생 또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주생이 귀족의 딸인 선화(仙花)를 만난 이후로 선화에게로 사랑이 옮겨가게 됐다. 주생은 선화의 남동생인 국영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는 선화 모친의 부탁을 받고 선화의 집으로 들어간다. 주생은 밤마다 선화와 사랑을 속삭였고, 배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배도는 주생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고 시름시름 앓다가 유언을 남기고 죽는데……
|
|
|
|
|


|
|
|